ABOUT 강소천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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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천 연보

강소천의 발자취아동문학을 위해 평생을 바친 어린이의 영원한 친구,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샘

1915년(1세)

  • 9월 16일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에서 아버지 강석우와 어머니 허석운의 2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남. 진주 강씨 통정공파의 29대손으로 본명은 용률(龍律).
  • 종손인 할아버지 강봉규가 세운 미둔리 교회의 주일학교를 다님.
  • 집안에서 운영하는 과수원(천명농원)과 일대의 산과 들을 뛰놀며 성장함.

1924년(10세)

  • 고원읍으로 나가 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함. 주말이면 혼자 두 세 시간씩 걸어서 미둔리 집을 오고 감.
    얼마 뒤 가족들이 고원읍으로 이사 와 다시 함께 살게 됨. 본적인 함경남도 고원군 고원면 관덕리 2번지는 여러 작품에서 작중인물의 고향 주소로 기술됨.
  • 학교에서 전택부·천세봉 등을 만남.

1928년(14세)

  • 4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돋보이는 작문으로 특별한 칭찬을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함. 이 시기의 같은 반 여학생 반장인 순이와 나눈 사랑 이야기가 뒷날 동요「순이 무덤」등 여러 작품으로 표현됨.

1930년(16세)

  • 『아이생활』에 동시「버드나무 열매」를 발표함. 이 작품이 공식 지면 첫 발표로 확인됨.

1931년(17세)

  • 고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의 영생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함.
  • 「봄이 왔다」「무궁화에 벌나비」(『신소년』2월호),「길가에 얼음판」「이 앞집, 저 뒷집」(『아이생활』3월호) 등 총 9편의 발표 동시가 확인됨.
  • 발표 초기에는 본명인 강용률과 필명인 강소천을 번갈아 쓰다가 1933년 이후에는 주로 강소천으로 활동했고, 월남하고 나서 이를 본명으로 개명함.
  • 영생고등보통학교에서 박창해 등을 만남.

1932년(18세)

  • 「가을바람이」(『아이생활』12월호) 등의 동시를 발표함.

1933년(19세)

  • 「연기야」(『아이생활』1월호),「이상한노래」(『어린이』5월호) 등의 동시를 발표함.
  • 조선어연구회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공포함.

1934년(20세)

  • 동시「달님얼굴에」(『아이생활』5월호)를 발표함.
  • 일제의 한글 탄압이 거세짐. 4학년 겨울방학 때 외사촌 누이 허흥순의 안내로 간도의 용정으로 감.

1935년(21세)

  • 용정 외삼촌 집에서 1년간 머무름.
  • 「호박꽃 초롱」(조선중앙일보 9월 3일자) 등의 동시를 발표함.
  • 윤석중의 청탁을 받고, 물을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는 닭을 보면서 고향 하늘을 그리워하는 동시「닭」을 창작함. 이 시기에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를 만남.

1936년(22세)

  • 용정에서 돌아옴.
  • 「제비」(『동화』6월호) 등의 동시를 발표함.
  • 4월에 영생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한 시인 백석과 교유함. 이후 백석에게서 동요 시집『호박꽃초롱』(1941)의 ‘서시’를 받음.

1937년(23세)

  •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함. 이후 광복 때까지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창작 동화와 동극을 실험하고 한글을 연구함. 조선의 아이들을 위해 우리말과 우리글로 된 동시집을 내야겠다고 결심함.
  • 이 무렵 손소희·박목월·황순원 등 여러 문인들과 펜팔로 교유함.
  • 『소년』 창간호에 「닭」이 발표됨.
  • 동화「재봉 선생」(동아일보 10.31)을 발표함.
  • 중일전쟁 발발.

1938년(24세)

  • 동시「봄비」(『아이생활』4월호), 동극「비바람은 지나고」(『아이생활』12월호) 등을 발표함.

1939년(25세)

  • 1938년 말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에 동화를 투고했는데 낙선함. 동아일보에서 낙선한「돌멩이」를 2월 5일부터 5일간 분재하면서 새로운 동화를 청탁해 옴.
  • 동화「빨간 고추」(동아일보 10.17), 동시「지도」(『아이동무』2월호)등을 발표함.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0년(26세)

  •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화「전등불의 이야기」가 당선되어 1월 6, 8, 10일에 게재됨. 동화「딱따구리」(『소년』12월호) 등을 발표함.
  • 장편동화『희성이의 두 아들』을 『아이생활』 9·10월 합본호부터 이듬해 2월호까지 5회 연재함.

1941년(27세)

  • 손소희가 간도의 만선일보 문화부 책임기자로서 동화를 청탁해「허공다리」를 2, 3월 연재함.
    당시 만선일보로서는 처음으로 원고료를 지급함.
  • 2월에 동요 시집『호박꽃 초롱』(박문서관)을 출간함.
  • 12월 7일 일본의 미국 하와이 공격을 시발로 태평양전쟁 발발.

1945년(31세)

  • 8ㆍ15광복.
  • 11월부터 고원중학교 교사로 근무함.

1946년(32세)

  • 3월에 북한 공산당의 하부 조직인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일명 문예총)이 결성됨.
  • 6월에 고향 친구인 유관우가 청진에서 아동문학 재건 운동을 하자며 소식을 전해 와 청진으로 감.
    청진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함.
  • 8월에 원산에서 ‘응향 사건’, 평양에서 ‘관서 시인집 사건’등이 일어나면서 북한 전역에 사회주의 문학 이념이 더욱 강화됨.

1947년(33세)

  • 동화「정희와그림자」(『아동문학』7월호, 평양)를 발표함.

1948년(34세)

  • 청진제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함.
  • 남북한이 각각 단독정부를 세워 실질적인 남북 분단이 시작됨.

1949년(35세)

  • 동시「나두 나두 크며는」(『아동문학』12월호, 평양) 등을 발표함.
  • 2월에 청진제일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둠.

1950년(36세)

  • 동시「둘이 둘이 마주앉아」(『아동문학집』제1집, 평양) 등을 발표함.
  • 6ㆍ25전쟁 발발. 흥남 철수 때 배편으로 월남하여 거제에 도착함.
    철수 작전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먼저 구조되는 극적인 상황을 경험함. 뒷날, 배 안에서 언 주먹밥 하나로 견딘 일이 큰 병의 원인이 된 것이라 진술함.

1951년(37세)

  • 거제를 거쳐 부산으로 건너가 지내다가 영도다리 근처에서 박창해를 만남.
  • 박창해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문교부(현 교육부) 편수국에서 근무하게 됨. 이곳에서 최태호를 처음 만나고 이후 평생지기가 됨. 전시 국어 교재를 편찬함.
  • 육군 정훈부대인 772부대의 문관으로 근무함. 대전에서 활동할 때 윤석중을 만남. 대전 지역 문우들과 교유함.
  • 부산에서 넷째 누이 용옥의 집에서 기거함. 전쟁에 참전하고 전역한 장조카 강경구와 1년간 함께 생활함.
  • 금강다방에서 김동리·손소희를 만남.

1952년(38세)

  • 박창해의 소개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경영하던 이춘우를 만나 월간『어린이 다이제스트』를 창간하고 주간으로 일함.
  • 광복 후 이북에 있을 때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쓴 것으로 알려진 동화「박송아지」를 기억을 되살려 다시 써서 발표( 『어린이 다이제스트』9월호)하는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함.
  • 『희성이의 두 아들』을 개작한 장편동화『진달래와 철쭉』을 『어린이 다이제스트』 11월호부터 연재함.
  • 9월에 제1동화집『조그만 사진첩』을 출간하고 27일 금강다방에서 김동리의 사회로 출판기념회를 개최함. 이때 문인·교수 등 수십명의 지인들이 참석함.

1953년(39세)

  • 동화「꽃신」(『학원』5월호) 등 여러작품을 발표함.
  • 7월 27일 휴전협정 후 서울에 정착함.
  • 아동문학가협회 아동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함.
  • 10월에 제2동화집『꽃신』, 제3동화집『진달래와 철쭉』(장편)을 연이어 출간함.

1954년(40세)

  • 문교부 교과용 도서편찬 심의위원으로 활동함.
  • 최수정과 결혼함. 이후 2녀 1남을 얻음.
  • 2월에『어린이 다이제스트』를 그만둠.
  • 동화「꿈을 찍는 사진관」(『소년세계』3월호), 「 꿈을 파는 집」(『학원』3월호), 「 어머니의 얼굴」(『소년세계』8월호)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함.
  • 6월에 제4동화집『꿈을 찍는 사진관』을 출간하고, 12월에 동화·동시·동극·수필 등을 담은『소년 문학선』을 출간함.

1955년(41세)

  • 장편동화『바다여 말해다오』(연합신문 5.21∼6.7), 『해바라기 피는마을』 (『새벗』1955년7월호∼1956년8월호), 중편동화「잃어버린 시계」(경향신문 9.10∼9.25) 등을 연재함.
  • 부산에 있을 때부터 전택부가 맡고 있던 『새벗』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다가 이해 8월부터 주간을 맡음.
    1960년 1월 퇴사할 때까지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문학과 교육을 연계하는 다양한 내용을 담음.

1956년(42세)

  • 한남동에서 살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 2가의 집을 장만해 옮김. 이후 10번지 14호에 2층집을 사서 개조하고 이사함. 2층을 서재로 삼아 글을 쓰고 손님을 맞음.
  • 중편동화「잃어버렸던 나」(한국일보 3.26∼5.3)를 연재함.
  • 6월에 제5동화집『종소리』를 출간함.

1957년(43세)

  • 5월 5일 강소천의 주도로 제정된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공포됨. 이는 1923년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과 더불어 어린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 쾌거로 평가됨.
  • 동화「메리와귀순이」(『어린이동산』1월호) 등 여러작품을 발표함.
  • 장편동화 『꽃들의 합창』 (『새벗』1957년 4월호∼1958년 3월호)을 연재함.
  • 12월에 제6동화집『무지개』를 출간함.

1958년(44세)

  • 한국보육대에 출강함.
  • 동화「나무야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경향신문 2.2)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함.
  • 동화「인형의 꿈」(경향신문 3.20∼5.21)을 연재함.
  • 『해바라기 피는 마을』이 영화화됨.
  • 12월에 제7동화집『인형의 꿈』을 출간함.

1959년(45세)

  • 이화여대에 출강함. 아동문학 강의를 처음 개설함.
  • 문교부 교수요목 제정 심의위원, 국정교과서 편찬위원으로 활동함.
  • 동화「분홍 카네이션」(동아일보 9.30∼12.27)을 연재함.
  • 장편동화『대답 없는 메아리』(연합신문 1.13∼4.19)를 연재함.
  • 12월에 동화 선집『꾸러기와 몽당연필』을 출간함.

1960년(46세)

  • 연세대에 출강함.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장이 됨.
  • 어깨동무학교 운동을 시작함.
  • 『새벗』주간을 그만두면서 수필「새벗을떠나며」 (『새벗』2월호)를 발표함.
  • 계몽사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기획을 전담함.
  • 동화「현이와 전나무」 (『가톨릭소년』5월호) 등 여러작품을 발표함.
  • 3월에 제8동화집『대답 없는 메아리』를 출간함.
  • 7월에 동화「어머니의 초상화」(소년한국일보 7.17∼7.31)를 연재함.
  • 이 무렵 교육계의 명망가 조석기가 교장으로 있는 인천 창영국민학교와 이화여대부속국민학교에서 글짓기 수업을 진행함.

1961년(47세)

  • 문교부 우량아동도서 선정위원으로 활동함.
  • 4월에 서울 성모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음. 이때 부산대 의대 학장으로 있던 장기려 박사가 상경해 집도함. 수술비를 받지 않은 장기려 박사에 대한 고마움을 뒷날 수필「은혜를 갚는 일」(1962.5.7)에 담음.
  • 8월에 서울중앙방송국 자문위원으로 활동함.
  • 10월에 아동문학연구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함. 한국문인협회이사가 됨.
  • 동화「나는겁쟁이다」 (『새벗』7월호) 등 여러작품을 발표함.
  • 12월에 동화ㆍ동시 선집 『강소천 아동문학독본』을 출간함.
  • 장편동화 『봄이 너를 부른다』(연합신문 1960.12.8∼1961.6.1)를 128회 연재함.
  • 조석기가 운영 책임을 맡은 배영사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림동화집 전5권을 출간함.
  • 이 무렵부터 1963년까지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퀴즈 올림픽」과 이를 이어받아 장수 인기 프로그램이 된 「재치문답」등에 고정 출연함.

1962년(48세)

  •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이사가 됨.
  • 동화「소나무의 나이」 (『새벗』1월호), 「시집 속의 소녀」 (『학원』12월호)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함.
  • 부정기 간행 잡지 『아동문학』 (주간 최석기, 편집위원 강소천·김동리·박목월·조지훈·최태호)을 배영사에서 창간함. 창간호에 동화「수남이와 수남이」를 발표함. 『아동문학』은 매호 아동문학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주제로 심도 있는 지상 심포지엄을 여는 등 아동문학의 이론적 저변을 확대한 잡지로 평가됨.

1963년(49세)

  • 1월에 제9동화집『어머니의 초상화』를 출간함. 『한국아동문학전집--강소천 편』이 발간됨.
  • 이 시기에 수시로 충청남도 온양(지금의 아산시)의 한 온천장에 가서 많은 원고를 집필하고 돌아옴.
  • 5월 6일 오후 1시 57분 서울대부속병원에서 간암으로 타계함. 10일 경기도 양주군 교문리(지금의 구리시 교문동) 가족묘지에 안장됨.
  • 5월 10일 제10동화집『그리운 메아리』가 출간됨.
  • 5월 20일 문화공보부에서 주최하는 제2회 5월 문예상 본상을 수상함.

1964년(1주기)

  • 1주기 추도식과 더불어 동시「닭」이 새겨진 강소천 시비 제막식이 열림.
  • 『강소천 아동문학전집』(전6권, 배영사)이 출간됨. 이 전집은 한국출판문화상(한국일보사)과 교육도서 출판상(대한교육연합회) 대상 도서로 선정됨.

1965년(2주기)

  • 소천아동문학상이 제정되어 운영됨. 배영사에서 주관하던 이 상은 계몽사를 거쳐 현재 교학사에서 운영하고 있음.

1975년

  • 『소년소녀 강소천 문학전집』(전7권, 신교문화사)이 출간됨.

1978년

  • 신교문화사 판 전집을 바탕으로 한 『강소천 문학전집』(전12권, 문천사)이 출간됨.

1981년

  • 『강소천 문학전집』(전15권, 문음사)이 출간됨.

1985년

  • 국민훈장 대통령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됨.

1987년

  •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강소천 문학비가 건립됨.

2002년

  • 인터넷홈페이지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www.kangsochun.com’ 개설됨.

2003년

  •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40주기 추모 행사를 개최함.

2006년

  •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 강소천 문고가 개관됨.
  • 『강소천 아동문학전집』(전10권, 교학사)이 출간됨.

2015년

  •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함.
  • 『강소천 평전』(박덕규, 교학사)과 『강소천 작가론』(김종회·김용희 외, 새미출판사)이 출간됨.
  • 동요 시집『호박꽃 초롱』과 제1동화집∼제9동화집 복간본(재미마주)이 출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