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강소천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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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천의 생애

강소천은 1915년 9월 16일(양력)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석우, 어머니는 허석운이었으며 소천은 이들의 둘째아들이었다.

소천이 태어난 미둔리는 대대로 강씨들만 모여사는 두메 산골로 일명 뫼뚜니라고 불렀다. 뫼뚜니는 눈이 많고 바람 소리가 높은 곳으로 봄이 더디게 찾아오는 고장이었다. 소천은 뫼뚜니에서 30대까지 시를 쓰며 살았다.
소천의 어릴 때 이름은 용률이었다. 동시를 쓰면서 소천은 작은 샘이란 뜻으로 소천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소천의 할아버지인 강봉규는관북의 성웅이라고 불리던 전계은 목사의 전도로 일찍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앙이 독실했던 강봉규는 친구와 함께 고향인 미둔리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므로 소천은 모태신앙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라났다. 소천은 어릴 때 부터 말썽꾸러기였다. 불장난을 하다 집을 태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또한 책을 좋아하여 별명이 책벌레이기도 했다. 소천의 어머니는 소천이 너무 책을 읽어 건강을 해칠까봐 책을 보지 말라며 매를 들기도 했다. 물론 소천이 매에 굴복했을 리 없다. 소천의 할아버지는 소천이 11세에 되던 해에 미둔리에서 고원읍으로 이사를 했다. 미둔리에는 학교가 없었으므르로 손자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천은 초등학교 3학년인 13살 때 평생 친구였던 전택부를 만나게 된다.
전택부는 소천의 첫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첫인상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아이처럼 불안해 하고, 주제가 몹시 째째하고 초라해 보였다. 새까만 얼굴에 눈은 더까매서 나들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골뜨기 티를 벗지 못 했다.
소천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 들어 가면서부터 의젓한 아동문학가로 변신한다. 고보 1학년이던 16세에 아동잡지인 아동생활에 버드나무 열매라는 동시를 발표하고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고원읍에서 잠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전택부를 다시 만난다. 이때 전택부는 고보 2학년이었다.

소천은 상급생인 전택부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전택부 떄문에 일제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전택부가 일본인 교사의 조선학생차별 대우에 항의, 동맹휴학을 결의했는데 곧 주모자로 색출당하여 퇴학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소천은 동시와 동요만을 써왔으나 이때 동화도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막연한 생각은 나중에 구체적인 동화가 되어 나타난다. 그는 첫화 돌멩이의 후일담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오랫동안 동요와 동시를 써 왔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 정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에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은 이야기며 그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이렇게 소천의 가슴을 분노에 떨게 했던 전택부 퇴학 사건은 그러나 2년 뒤 전택부가 학교에 다시 복교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소천은 4학년 동급생으로서 전택부를 다시 만났다. 전택부 퇴학 사건은 복교로 마무리되었으나 일제에 대한 소천의 분노는 더욱더 깊어만 갔다. 일제는 무자비한 한글 탄압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쓰는 소천에게 한글 탄압이란 그야말로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학과 시간에 조선어 독본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독본은 조선 사람으로서의 얼을 심고 가꾸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식민지 교육을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 속에 담긴 문장이 오죽 했겠는가? 당연히 소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일제는 그나마 조선어 독본 시간마저도 없애버렸다. 소천의 실망과 울분, 좌절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4학년, 겨울 방학이 되었고 소천은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이 끝난 뒤에도 소천은 학교에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느낀 분노와 절망을 가눌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소천은 1년 동안 북간도로 가서 방랑했다. 북간도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소천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동시 닭을 창작했다.

나중에 이 동시는 독립이 된 뒤에 이계석이 곡을 붙여 어린이들이 애창하는 노래가 된다. 이 닭이란 작품은 아동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렸다.
1936년, 소천이 22세 때였다. 후일 아동문학가이며 교육자인 최태호는 닭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소천은 이 동요 한 편만으로 눈을 감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짧은 글. 32개의 글자로서 능히 조그만 세계의 찰라를 영원으로 바꾸고 아무데서나 발견할 수 있는 현상에 생명을 빛냈었기에......
‘닭’은 강소천의 이름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출세작이었던 것이다. 소천은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는 소천에게

학업을 마칠 것을 권유했다. 소천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 들여 학교에 복교, 마지막 학년을 마쳤다. 영생고보를 졸업한 뒤로 소천은 열심히 동시나 동요를 써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소천에게는 무척 행복한 나날들 이었다. 1939년 처음으로 소천은 돌멩이라는 동화를 썼다.
이 돌멩이는 동시에 가까운 작품으로 동아일보에 실렸다. 소천은 일제의 한글 탄압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나 결코 꿈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돌멩이’는 소천의 절망과 꿈을 함께 담고 있는 작품이다.

소천은 진심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아이들에게 촛불을 켜 주고 싶었다. 호박꽃 초롱은 그 내용처럼 아이들 어두운 마음에 촛불을 켜 주는 동시집이었다. 소천은 나이 31세 때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소천의 기쁨은 컸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천은 고원 중학교의 국어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재직한 지 일년 쯤 되었을 때 고향 친구 중 한 사람인 유관우가 소천에게 연락을 보내왔다. 유관우는 교회 친구들과 아동문학연구회를 조직했는데 소천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는 아동문학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던 때였다. 소천은 그때 마침 아동문학의 맥을 잇고, 아동문학을 활성화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천은 망설이지 않고 유관우가 있는 청진으로 뛰어갔다. 소천은 2년간 청진여자 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동문학 재건에 열성을 쏟았다. 이러는 사이에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민족의 광복 이후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시작했다. 1947년 9월 17일 제2차 유엔 총회에서 한국위원회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제의했고 정부가 수립되면 미, 소 양군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극력 반대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남한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했다. 즉 군정 3년만인 8월 15일에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48년 9월 9일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만들었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들은 일제 때보다 더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소천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어 온 집안인데다 대지주 집안이었다. 이런 소천의 집안을 곱게 볼 리 없었다. 소천은 재산을 모두 빼았겼을 뿐만 아니라 언제 인민재판에 회부 될 지 몰라 불안에 떨며 지냈다. 그러나 소천에게는 아동 문학을 위해, 아니 어린이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1950년 6.25가 일어났다. 소천은 이때 청진에 있는 제일고급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있었다.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으나 남한의 반격으로 9.28 수복을 거쳐 1.4 후퇴가 있었다. 소천은 그동안 틈틈이 써 모은 동시와 동요 및 동화 작품이 담긴 공책 한 권만 들고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흥남까지 갔다. 그런데 미군은 철수 작전에 방해가 된다면서 소천을 비롯한 피난민들을 모두 유치장에 수용시켰다. 소천은 모든 희망을 잃고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때 어떤 청년이 미군 헌병들을 데리고 “여기 혹시 기독교 신자가 있습니까? 있으면 손들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소천이 손을 들자 그 청년은 소천을 유치장에서 빼내 LST라는 미군 함정에 태워 주었다.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문 앞에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이었다.

소천은 얼마 뒤 거지꼴이 다 되어 거제도에 상륙했다. 소천은 다만 살기 위하여 산판에 가서 나무도 끌어내리고 장터에서 생선장수도 했다. 그러나 소천이 하고 싶었던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는 일이었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소천은 더욱 간절히 그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소천은 밝은 모습으로 뛰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고 싶어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갔다.

그 학교의 교장은 소천의 남루한 모습을 보고 부랑인이라 여겨 학교 밖으로 쫒아내려고 했다. 소천이 그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교장은 깜짝 놀라고 반색했다. 교장은 소천의 작품을 읽고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천은 이때 남쪽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구나 하고 새로운 창작 의욕을 느꼈다.

그 뒤 소천은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소천은 많은 문인들과 옛 친구를 만났다. 소설가 김동리는 이때의 소천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는 매일같이 문교부로 학교로 교회당으로 그의 연고지가 있고 일감이 있는 데를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그것은 단신으로 피난을 와서 생계가 막연하기 때문에 일감을 찾으러 다니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 위인이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다거나 빈둥빈둥 놀고먹지는 못하기 때문인 듯 했다. 쉴 사이 없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 자기의 일감을 얻어 오기도 하느라고 그렇게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부산에서 소천은 문인들과 친구들, 친척들을 만나면서 소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동문학가 이며 교육자인 최태호는 문교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교과서 만드는 일을 도와 달라고 소천에게 부탁했다. 소천은 그때부터 문교부 편수국에서 교과서를 만들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소천은 아동문학뿐만 아니라 아동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52년 소천은 월간 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이 되어 어린이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소천은 신문과 잡지에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해 여름에 소천은 첫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을 출판했다. 이 동화집에는 박송아지, 딱따구리, 돌멩이 1~2 등 16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최태호는 소천의 부탁으로 조그만 사진첩을 읽고 이렇게 발문을 썼다.

소천이 이번에 조그만 사진첩을 출판한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그 교정본을 얻어 그의 수십년 간의 작품을 통독할 기회를 가졌고 덕분에 나의 숙제를 완전히 풀었다. 그는 기교로써 출발하지 않고 무한한 애정으로 먼저 어린이를 관찰하고 파악하였다. 참으로 어린이와 함께 생각하면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소박하고 대담한 작품이 나타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소천 역시 시대와 같이 맞씨름하면서 살아왔다. 왜정의 중압 속에서 그는 안으로 불타 들어가는 정열을 돌멩이로 팽개쳤고 넘쳐흐르는 울분을 딱따구리로 발산하였으며 토끼 삼형제로 승화시켰다. 그리하여 해방의 기쁨을 박송아지로 수줍게 환희하였다. 조그만 사진첩의 종교에까지 승화된 휴머니즘도 동란이 가져온 시대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이때 어린이들에게는 읽을 만한 동화책 한 권이 변변히 없었다. 게다가 전쟁중이라 어린이들의 생활은 어둡고 비참했으며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가족과 헤어진 어린이들도 많았다. 조그만 사진첩에 실린 동화중에는 전쟁 때문에 가족이 헤어져 살아야 하는 이야기도 많은데 바로 이런 이야기가 메마른 어린이들의 정서를 흠뻑 적셔 주었다. 소천은 불행과 슬픔에 빠진 어린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며 또 무엇이 불행과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지 잘 알았던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쟁의 포성이 멎었다. 부산에 피난 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향했다. 소천도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소천은 옛친구 전택부를 만났다.

전택부는 기독교서회 편집부에 있다가 새벗의 주간이 되었다.

새벗은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잡지이다. 소천은 전택부와 왕래하면서 새벗사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1955년 전택부는 사상계라는 잡지사로 직장에 옮겼는데 이때 그는 후임자로 소천을 추천했다. 소천은 새벗의 주간이 되어 안정된 마음으로 왕성하게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 해에 두 번째 동화집 꽃신을 출판했다. 꽃신은 꿈을 찍는 사진관과 함께 강소천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꽃신 속에서 그리운 얼굴, 방패연, 푸른 태양, 인형과 크리스마스 등 17편의 동화가 실려있다. 이어 세 번째 동화집 진달래와 철쭉도 출판했다. 소천은 일제에게 우리말과 글을 빼앗겨 본 경험 때문인지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열띤 어조로 한글 사랑을 외쳤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우리 글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그 어려운 한문을 굳이 가르치는가?
한글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이 세상에 우리 글만큼 훌륭한 글은 없다.

그의 이런 말은 한글 사랑뿐만이 아니라 열렬한 마음으로 어린이 사랑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소천은 직장에 다니면서 작품만을 썼던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1953년 한국문학가협회에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에 선임되면서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55년에는 한국아동 문학연구회를 만들어 아동문학가 모임을 가졌다. 이 해에 네 번째 동화집 꿈을 찍는 사진관이 출간된다. 이즈음 소천의 작품에는 꿈을 그린 동화가 많이 나타난다. 인형의 꿈, 꿈을 파는 집, 커다란 꿈, 8월의 꿈, 꼬마들의 꿈, 노랑나비의 꿈 등이다. 전쟁 때문에 헤어진 가족들의 그리움을 꿈속에서나마 달랬던 것이다.

동시도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썼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소천은 점점 그리움과 꿈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소천은 어린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 주는 교육성이 강한 생활동화를 쓰게 되었다. 소천은 꿈과 교육은 동화에서 그 비중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때 이 땅의 어린이들은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의 땅에 살고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더 급한 것은 독서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이들의 심성도 날로 황폐하여져 갔다. 소천은 동료들에게 이럴 때일수록 아름다움을 안겨 주는 동화가 필요하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이 사랑은 소천이 동화를 쓰는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소천은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어린이 헌장을 만들게 된다. 1957년, 사람들이 전부 폐허를 복구하며 먹고 사는데 급급하여 어린이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였다. 어린이 헌장은 강소천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이고 다듬어 만들었으나 당시 아동문학가협회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어린이 헌장은 다음과 같다.

- 어린이 헌장 -

  1. 1.어린이는 인간으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져야 한다.
  2. 2.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3.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4.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의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5.어린이는 위험한 때에 맨 먼저 구출해야 한다.
  6. 6.어린이는 어떠한 경우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7. 7.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 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 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와 부랑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8. 8.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여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9.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위의 어린이 헌장은 1957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발표되었다. 방정환이 어린이 사랑 운동을 맨 처음 시작하였다면 소천의 어린이 헌장 발표는 어린이 사랑 운동의 결실이었다. 그때까지 어린이를 사랑하자. 어린이를 위하자라고 여러 사람들이 외치고 있기는 했으나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어린이 헌장은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어린이 헌장 발표 한 해 전인 1956년에 소천은 다섯 번째 동화집 종소리를 출판했다. 1957년에는 여섯 번째 동화집 무지개를, 1958년에는 일곱 번째 동화집 인형의 꿈을 각각 출판했다. 소천은 매우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썼다. 어쩌면 소천은 자신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1959년에 소천은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기독교학과와 국문학과, 그리고 대학원의 도서관학과의 강의를 맡았다. 그 뒤 연세 대학교에서도 기독교학과와 국문학과 강의를 맡았다. 이때 아동문학 강좌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의 강의 과목에 넣게 했다. 영생고보 때부터의 친구이며 대학교수이였던 박창해는 이때 소천에게 교수가 될 것을 권해 보았다. 그러나 소천은 거절했다. 내가 할 일은 대학생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린이에게 끊임없이 좋은 동화와 동시를 주는 일이다. 이것이 그의 거절 이유였다.

1959년 10월 소천은 문교부 교수요목제정 심의위원이 되고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이 되어 교과서 만드는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1960년에 소천은 여덟 번째 동화집 대답없는 메아리를 출판하였다. 같은 해에 소천은 아동문학연구회의 회장이 되었다. 이때 소천은 아동문학가들은 어린이 교육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천은 또한 아동문학독본을 출판하였는데 이렇게 문학독본을 만든 것은 어린이들에게 맞는 문장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1961년 소천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수술 경과가 좋아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이때 의사는 너무 무리하게 일을 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소천은 동화를 쓰는 일과 아동문학을 연구하는 일로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학교도서관을 설립토록 권유하고 학교에서 어린이 신문이 발간될 수 있도록 항상 이야기하였다. 1963년에는 아홉 번째 동화집 어머니의 초상화를 냈고 같은 해 그리운 메아리도 출판했다. 이와 같은 무리한 활동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이번에는 간암이었다. 이때 소천의 나이는 48세였다. 소천은 끝내 간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교문리에 안장되었다. 그가 떠난지 약 보름 뒤인 5월 20일에 그에게 문예상 본상이 수여되었다.

1965년부터 김동리, 박목월, 박종화, 조지훈, 조석기, 최태호 등의 문학가들이 그의 부인 최수정과 함께 소천 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이 상은 후배 아동문학가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1985년 10월 19일 문화의 날에 국민훈장 대통령 금관 문화훈장이 소천에게 수여되었다.
소천은 자신이 일찍 죽어 별이 되리라 예감을 했는지 그의 시 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