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강소천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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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호박꽃 초롱은 내 교과서 - 소천과 나

1941년에 나온 강소천 동요시집 ‘호박꽃 초롱’은 내 교과서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소천을 스승으로 여겨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호박꽃 초롱’은 여섯 쪽이 떨어져 나간 헌책이었다.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이를 알면 베껴 내고 싶어서 이리 저리 물어보아도 가진 이가 없었다. 그러던 1951년 서울 재탈환 이듬해였던가 선생을 알게 되었다. 월남한 분이 이 책을 가지고 있을 성싶지 않아 자랑겸 허실수로 물어보았다.
“남한에 왔더니 누가 가지고 있던 것을 내게 주었는데, 책이 몹시 헐었어요. 당신 것이 혹시 새책이거든---” 하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알아챘다. 소천이 깨끗한 책을 간수하고 싶어서 바꾸자는 눈치였다. 이 때 소천은, 세사 장난하는 어린이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주께 새집 다구.” 하고 중얼거리듯, 무척 순진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 작고하시기 서너 달 전에 서울 글짓기회 연구회에 강사로 불려 나갔을 때였다. 소천 선생이 강의를 막 끝내고 앉아 있는 모습이 초췌해 보였다. 적이나 하면 먼저 돌아갈 법한데, 끝까지 앉아 있었다.

사회자의,
“----특히 몸이 불편하신데도 나오셔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강소천 선생께 감사한다.”는 말을 듣고 몸이 아픈 줄 알았다.

파해 나오는데, 어깨가 축 처지고 걸음걸이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차라도 한 잔 하시자고 권했더니,
“바로 집으로 들어가야겠어.” 하고 인사도 받지 않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 버렸다. 섭섭하리만큼 매정스러웠다. 여느 때 같으면 그냥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 다. 글짓기 이야기를 또 꺼내고 기염을 토했을 텐데---. 나와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는, 숨을 거두기 27분 전이었다. 이태 전에 위암을 수술하고, 경과가 좋아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얼굴이 퍽 좋았었다. 그 때 집도했던 장기려 박사가 고맙다고 입에 침이 없이 치하했다.

“간이 조금 나쁘다고 약을 가르쳐 줬어. 이젠 살았어.” 하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퇴원하고는, 좀 쉴 줄 알았더니,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작품을 써 내고, 방송국이다,
학교다, 정말 동분서주했다. 작품을 보거나, 방송을 들을 적마다,
“저 분이 몸을 너무 마구 부리는군.”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더니, 방송에도 안 나오고, 작품도 그닥 보이지 않았다.

“위암이 재발되었나?” 하고 궁금해 하던 차에 만나게 되었다. 건강이 어떠시냐고 물었다.

“일전에 렌트겐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위 속은 깨끗하대.” 하며, 아동문학 이야기를 꺼냈다. 날이 어두운 뒤에 다방을 나와 저녁을 사주겠대서 충무로까지 갔다.
소천은 그날 책을 많이 샀다. 소천은 책을 많이 읽는다. 그의 서재를 보고 놀랐다.

내 노래에 <꽃밭에서>라는 게 있다. 피난 중에 대구에서 내던 <소년세계>에 발표한 것이다. 이 노래에 서로 모르는 사이인
권길상씨가 곡을 붙였다. 곡이 좋아서 한동안 불렸다. 이름 없는 내 노래가 어린이들의 입에 오르니 적이 기뻤다. 소천은 처음 보는 나에게,
“꽃밭에서가 많이 불리더군요. 그렇지만 2절은 동심이 아냐. 2절만 고쳤으면 좋을 것 같애.” 라고 맞대놓고 타박을 했다. 부끄럽고 고마웠다. 뒤에서 흉보기가 일쑤인데 맞대놓고 일러 주는 것이 얼마나 솔직한가!
이러는가 하면, 내 노래 중의 <이른 봄>이 좋다는 소리를 여러 차례 했다. 칭찬하기란 흉보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소천은 타박만 하는 게 아니라 칭찬할 줄도 아는 분이었다. 나는 첫 동요시집<봄 오는 소리>를 엮으면서, 2절을 고쳐 넣을까 했으나 뜻대로 안 되어 빼고 말았다. <새벗>에 <동시 꽃다발>을 실을 적 일이다. 다달이 한 사람의 동시가 너덧 편식 한몫에
실렸었다. 하루는 소천이,
“다음번엔 당신 차례니 작품을 보내시오.” 하기에, 내깐엔 꼭 발표하고 싶었던 고아와 어머니를 주제로 한 일련의 동시를 보였다. 한번 죽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왜 이렇게 슬픈 걸 쓰우.” 하고 책상 서랍에 넣어 버렸다. 그 달엔 다른 분의 것이 실렸다. 소천은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엄격했다. 소천은 꽤 자상한 분이 다. 내가 어린이 시간에 ‘동시 감상’을 작가별로 한동안 방송한 일이 있다. 소천편 방송이 끝나자 전화가 왔다. 소천이었다.
내 방송을 녹음해 놓았다는 것이다. 동요 <닭>외에 네 편을 골랐는데 고향과 어머니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구월>이란 동시는 이북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한 것이다. 나는 이걸 읽고 해설하면서 내가 소천이 되어 목이 메었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소천이
“우리 집에 놀러 갑시다.” 하고 앞장을 섰다. 일행이 서넛 되었었다. 소천은 우리가 자리에 앉자 곧 녹음기를 꺼내고 ‘동시 감상 강소천 편’ 테이프를 걸어 주었다. 나는 농조로,
“이담에 내가 죽은 뒤에 내 목소리를 듣고 싶거든, 강선생 댁엘 찾아가라고 자식놈에게 일러 놓아야겠네.” 했더니,
“시시한 거 지워 버리지, 하하하---.” 하고 어린애처럼 웃었다.

소천은 술도 담배도 입에 안 댔다. 그렇지만 술 먹는 사람하고 잘 어울리고 술자리에선 술 먹은 사람보다도 잘 놀았다. 그러다가 도 아동문학 이야기를 꺼내서 입바른 사람의 핀잔을 받곤 했다. 언젠가 HLKA ‘학교방송’ 10주년 기념 공개방송에서 불려 나갔다. 아나운서가 노래를 시켰다. 내 옆에 앉았던 소천은 수첩에다 뭘 부지런히 쓰고 나서,
“난 이걸 부를 테야, 가사 맞지?” 하며 내게 보였다. 내 노래 <꽃밭에서>의 첫 절이었다. 그랬지만, 아나운서가 소천에게만은 당신의 노래 중에서 부르라고 해서
<태극기>를 불렀었던 것 같다.

그 뒤 내가 책 한 권을 엮게 되어 소천에게 글을 부탁했더니 써가지고 내게 왔다.
“쓰기만 하고 읽어 보지 못했어.” 하며, 돋보기를 꺼내 썼다. 나는,
“아니, 돋보기를---.” 하고 놀라는 체했더니,
“왜, 나도 이젠 할아버지야!” 하고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돋보기를 쓰고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되도록 동화를 쓸 줄 알았더니, 머리가 희기도 전에 가 버린
소천의 영전에 놓인 <호박꽃 초롱>이 내 것보다 새 책이었다.

저자: 어효선
동요 ‘꽃밭에서’로 많이 알려진 원로 동시인이십니다.
교육계와 출판계에서 일하시며 아동도서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고, 어린이 글짓기 교육에 힘쓰면서 서예가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제 19회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