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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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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헌장과 어깨동무 학교 (강소천 선생의 어린이 문화운동)

1. 어린이 헌장 초고 작성에서 제정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헌장이 제정 선포된 것은 1957년(단기 4290년) 어린이 날이었다. 이 헌장이 제정되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핵심적인 일을 한 분은 강소천 선생이었다. 강 선생은 훤칠하신 키에 항상 공책과 책을 책보에 싸서 옆에 끼고, 비스듬이 기울어진 자세로 부지런히 걸으셨다. 묵묵히 생각하시면서 걸으셨다. 늘 어린이와 아동문학을 생각하셨다. 생각에 골돌하다가 그 생각이 열리면 어린애처럼 좋아하셨다. 검은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셨다.

1956년 더위가 막 고개를 숙이려고 할 무렵, 어느 날 오후로 기억된다. 내 사무실 아래 다방으로 오셨다. 마주 앉자마자 바로 그 환한 웃음을 웃으시며 “지금 보사부 다녀오는 길인데, 부녀국장이 추진하기로 했어요.” 추진하시던 어린이 헌장 제정 문제였다.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바로 그 환한 웃음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강소천 선생은 ‘어린이 헌장’ 문제에 골돌 하게 매달리셨다. 그 전부터 생각하셨는지는 모르지만 56년 어린이날을 보낸 뒤, 유엔 의 아동권리 선언과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옮겨 적고, 헌장 초안을 만들 내용들을 적은 공책을 가지고 다니셨다. 헌장 제정을 맡을 주무과는 보건사회부 부녀국 후생과 아동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은 주무과 담당자를 만나러 가끔 보사부에 들르셨다. 내가 일하던 사무실이 바로 보사부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에 좋은 소식을 그렇게 알려 주신 것이었다.

그 해 연말, 선생께서는, “어린이 헌장 초안을 건의해야 하는데, 동화작가협회 이름으로 하는 게 좋겠지요. 마 선생(마해송 한국 동화작가협회장)을 한번 만나 상의 드려야겠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해가 바뀐 뒤인 57년 초 동화작가협회 회원들이 시청 옆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어린이 헌장 문제를 협의하고 동화작가협회 이름으로 건의한다는 합의절차를 거쳤다. 공식 건의는 삼일절을 기해 국회(민의원) 문교부 보사부에 각각 협회 기초안을 첨부한 건의서를 보냈다. 신문에 보도된 것은 3월 3일이었다. 그 뒤 선포에 이르는 추진 경위는 보사부의 국무회의 상정 안에 첨부된 문서에 기록으로 자세히 남아 있다.

1957년 어린이 헌장 제정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날 제정에 이은 어린이 사랑의 큰 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어깨동무 학교 운동과 강소천 선생

1960년 4.19혁명은 각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당시의 집권 민주당 정부는 많은 개혁과제를 마련하고 실천에 옮겨 나갔다. 교육개혁 쪽에는 성내운 선생이 깊이 간여하고 있었다. 그해 연말에 성내운 선생이 신문사에 전화로 ‘낙도 벽지 교사들의 특별 연수’ 시행 소식을 알려 주셨다. 옛날 죄지은 사람 귀양 가듯 낙도나 벽지 학교로 쫓겨 간 소외된 교사들에 대한 민주당 정부의 특별한 배려라는 것이었다. 자유당 정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책이었다. 연수에 참석한 낙도 벽지 교사들을 모시고 좌담회를 열기로 하였다. 마침 사범학교 동창 한 사람이 끼어 있어 소외 지대의 비참한 생활환경과 어린이들의 참상을 대충 들은 적이 있어 기대를 하였으나 교사들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신문사 회의실에서는 안 되겠기에 ‘좌담회’는 끝낸다고 선언하고 참석자 전원을 모시고 술집으로 갔다. 술이 거나해지자 쏟아 내는 이야기들은 모두 먼 나라 미개한 부족들 이야기만 같았다. 기록을 위해 배치한 기자 두 사람이 메모하기에 진땀을 흘렸다. 이 이야기는 3회에 걸쳐 신문 문화면을 메꾸었다. 다음 날 부터 낙도나 벽지의 참상에 놀란 착한 마음들의 온정이 신문사로 몰려들었다. 벽지 교사들이 연수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들은 전교생이 1년 이상 쓸 공책과 연필과 읽을거리 책들을 한 짐씩 지고 갔다. 이 기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시던 강소천 선생 이 ‘영속적인 결연운동’으로 끌고 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래서 도시 학교와 벽지 학교의 결연운동이 신문사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자매결연이란 말은 좋지 않아요. 누구는 언니, 누구는 동생. 이건 안돼요. 어깨동무 --- 어깨동무 학교 --- 어때요.”

어깨동무 학교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셨다. 강 선생께서는 어깨동무 학교 노래 말도 지어 주시고, 당시 재동학교에 계시던 이계석 선생께 부탁하여 곡까지 붙여 주셨다.

‘거리에서 두메에서 외딴 섬에서 ---’

이때부터 낙도, 벽지란 말 대신 외딴 섬과 두메, 두메 학교 외딴 섬 학교라는 말이 정착되었다. 강선생께서는 이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 싶어 하셨으며 문제점에 대해서 조언해 주셨다. 외딴 섬을 찾아가는 도시 학교 어린이들과 어울려 배 위에서 함께 어깨동무 학교 노래를 부르며 환하게 웃으시던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이 사업은 서울일일신문의 폐간으로 새로 들어선 군사 정부에 의하여 결연사업을 총괄하는 재건국민운동 본부로 이관되었었다.

어깨동무 학교 / 강소천

1.거리에서 두메에서 외딴 섬에서
부르네 대답하네 어깨동무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세듯이
마음으로 그려보는 먼곳 동무들
굳게 맫은 어때동무 학교와 학교
가는 정 오는 정 꽃피우는 우정

2.거리에서 두메에서 외딴 섬에서
마음의 손 놓지 말자 어깨동무들
서로 돕고 살아가는 이 마음 키워
살기 좋은 대한 나라 우리 만들자
굳게 맫은 어깨동무 학교와 학교
가는 정 오는 정 꽃피는 우정

요즈음도 강 선생이 생각날 때면 나는 가끔 이 노래(어깨동무 학교)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강소천 선생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굶어 죽는 북한의 어린이들 이야기를 듣고 결코 그대로 계시지 않으실 것이다.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 운동을 펼치시지 않을까? 구체적인 실천 운동의 길을 열고 거기에 앞장서고 계시겠지. 구호는 요란하고 허세는 웅장해도 실천이 없는 오늘 우리 사회를 걱정하시며, 어린이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실천운동이 왜 없느냐고 꾸짖으시는 것만 같아 송구스럽다.


3. 아동문학연구회와 어린이 문화운동

세상에 빛을 남긴 사람들은 앞을 내다보는 분들이었다. 선각자라는 분들에게는 미래를 투시하는 특별한 혜안이 있었다. 동화 ‘꿈을 찍는 사진관’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을 미리 내다 보셨고, 동시 ‘금강산’을 통하여 오늘의 금강산 관광을 선각자의 혜안으로 예견하신 것만 같다. 작품을 통해 나타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못지않게 선생의 앞을 내다 본 어린이 문화운동에 괄목할 업적들이 많다. 그렇게 바쁜 가운데에서도 방송에 자주 출연하여 어린이와 국민들에게 더욱 친숙한 작가가 되었으며 ‘아동문학가’의 위상을 한층 높여 주셨다. 어린이 시간 외에 퀴즈 올림픽, 재치문답 등에서 아동문학가의 이미지를 재치 있는 멋진 박사님으로 바꾸어 주셨다.
작품 쓰시는 틈틈이 어린이 글짓기 지도에 힘을 기울이신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인천 창영초등학교를 6개월 동안 보수 없이 찾아가 지도하셨고, 이대부속초등학교 어린이들도 틈나는 대로 찾아가 지도해 주셨다. 이 때의 경험과 기록들을 토대로 1학년 에서 6학년까지 학년별 글짓기 지도 강좌를 완성하였다. 선생의 이 저술이 다시 빛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화여대와 연세대와 몇 몇 전문대(보육학교)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면서 기록한 20여권의 아동문학론 노트도 빛을 받아야 할 귀한 자료이다.

(1) 아동문학연구회 창설 또 하나 아쉽고 죄스러운 것은 강 선생 주도로 큰 뜻을 밝히고 출범한 아동문학연구회가 선생의 타계 이후 이어지지 못한 점이다. ‘아동문학과 교육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모여 어린이 세계의 탐구와 그들이 지녀야 할 참모습을 문학과 행동으로 구현하자’는 강 선생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었다. 여러 경험을 통해 문학과 교육과 어린이 문제를 행동으로 구현하는 모임이 절실하다고 생각하셨다.

아동문학연구회 발기 취지문

여기에 우리 아동문학과 교육에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모여 어린이 세계의 탐구와 더불어 그들이 지녀야 할 참모습을 문학과 행동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우리는 아동문학에의 직접적 관심뿐만 아니라 사회 환경에 따르는 교육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어린이들의 독서적 문학적 환경을 개혁하기 위하여 창작지도 평론 각 부면에 활동할 것이며 아동심리의 통찰자로서 그들의 인간형성을 돕는 인생과 사회의 교사가 될 것을 희구한다.

한국의 어린이는 그늘진 골짜기 속에 헤매고 있다. 그들이 호흡하는 공기는 어른으로 혼탁 되었고 그들이 사는 땅은 속악으로 오염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들의 성장과 복지를 위하여 그 얼마나 어른의 준비와 노력이 있어 왔는가를 생각할 때 방치된 이 나라 어린이의 앞길은 오직 암담할 따름이다.
이제 진정한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서서 우리는 있어야 할 우리의 어린이와 아동문학을 무시하고 내일을 구상하며 오늘을 생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어린이를 그들의 천부에 따라 성장시켜야겠고 또 어린이 속에 깃든 영원한 인간의 참모습을 이 땅에 펼 자부심을 갖는다.
우리는 이른바 신문명이 이 땅에 수입된 시대의 선구자를 상기한다. 일제질곡(日帝桎梏) 아래에서도 민족의 자주독립을 믿던 소파선생의 아동문화운동을 다시 상기한다. 그리고 신(神)에서 봉건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온 인간의 역사 속에 흐르는 문예부흥을 또한 높이 평가한다.
한국의 아동문학이 아직 역사 오래지 않고 아동문화 또한 전문가적인 활동에만 의존할 수 없는 사회적 실정에 비추어 더욱 많은 동지들의 새로운 의욕을 함께 갖고자 이 모임을 아동문학연구회로 이름 하여 이에 발기한다.

1960년 11월 발기인 일동
강소천(작가-회장), 김선영(세검정교교사), 김용욱(청구교교장-부회장), 김종태(수송교교사), 김한배(서울사 대부초교사), 박목월(시인), 박재규(제동교교감), 박창해(연세대교수), 방기환(작가), 서석규(서울일일신문 기자- 총무), 서성옥(인천창영교사), 심경석(충무교교사), 어효선(작가), 이재영(평론), 이준구(작가), 장옥순(연기군삼 지교교사), 정삼주(일신교교사), 최태호(평론)

강 선생께서 회장을 맡으시고 부회장은 김용욱 교장님이 맡으셨다. 아동문학뿐 아니라 교육 및 어린이 문화 전반에 걸쳐 더 깊이 연구하고 행동하기 위한 모임으로, 공보처에 등록한 유일한 문학단체였다. 모임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청계초등학교에서 가졌었다.

(2) 우리말 우리 노래 선생의 나라 사랑, 겨레 사랑, 어린이 사랑은 남기신 240여 편의 동시(동요 포함)와 140여 편의 동화(소년 소설 포함, 이 가운데 장편 10편)와 6편의 동극 등 문학작품 구석구석 스며 있지만, 특히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 말에 더 진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선생께서는 서양의 생일축하 노래 대신 우리 축하 노래가 아쉬워 지은 우리 ‘생일축하의 노래’를 남 기셨다.

생일 축하의 노래 / 강소천

1. 오늘은 영이의 기쁜 생일 날
우리들은 다같이 축하합니다.
랄랄랄라 다 같이 노래 부르며 어깨춤도 추면서
영이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2. 오늘은 영이의 기쁜 생일 날
가슴에다 예쁜 꽃 달아 주고는
랄랄랄라 노래 부르며 어깨춤도 추면서
영이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우리 정서 우리 리듬의 이런 노래들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도 함께 걱정해야할 과제이다. 전통을 존중하는 서구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의 노래를 특정한 몇 사람의 입맛대로 마구 갈아 넣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교과서 개편 때 바꾸어 넣을 필요가 있을 경우, 단 한곡 이상은 바꿀 수 없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 3대가 함께 부르는 노래는 가정을 따뜻하게 지키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선각자들의 혼이 담긴 어린이 헌장을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한다’는 구절이 마음에 걸린다고 ‘서울 부자 동네 어린이 기준’으로 뜯어 고치는 우리 사회의 경망한 자세가 안타깝다.

(3) 큰 발자취를 지키고 기리기 위하여 경박한 사회는 선생의 큰 발자취를 자기 것으로 포장하려는 ‘작품 도둑’까지 등장하는 세상이 되었다. 선생의 동요 ‘태극기’를 어느 작가가 ‘태극기’는 내 작품이라면서 음악저작권협회에 시정요구를 낸 적이 있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진 현역 아동문학가 두 사람이 여기에 ‘태극기’는 강소천 선생 작품이 아니라는 ‘보증서’까지 첨부하여 제출한 것이었다. ‘작사자가 바뀐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달라는 협회측 요구에 그 모씨는 ‘어느 출판사의 동요곡집에 내 이름이 들어 있어 그런 줄 알았다’고 했다. 증거자료 제출 촉구에 보증인들도 발을 뺐다. 이 문제는 다행이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확실한 여러 증거들과 이를 잘 아는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도둑 맞지 않고 지켜지긴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유족 측에서 제시한 증거들에 대하여 ‘그 모씨’(아동문학가)의 가볍게 던진 다음 한 마디는 경박한 사회의 한 단면이라며 가볍게 넘기기엔 너무 서글펐다.

“어떻게 그런 자료를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나요?”
저자:서석규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강소천 선생 심사로 동화가 당선되어 등단한 동화작가이십니다. 신문사 문화부에 근무하면서 강소천 선생 생전에 가장 가까이 선생님을 모신 후학 중의 한 분입니다.